AI 에이전트 시대, 한국의 선택 (자율 에이전트, 도메인 지식, 산학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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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P의 시가총액이 3,400억 유로에서 1,900억 유로로 반 토막 났습니다. 세일즈포스와 워크데이도 같은 압박을 받고 있습니다. 소프트웨어가 세상을 지배하던 시대가 끝나고, 이제는 AI가 그 소프트웨어마저 집어삼키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 흐름을 멀리서 관찰하는 게 아니라, 실제로 사용자들의 요청이 "정보 검색"에서 "업무 대행"으로 바뀌는 걸 매일 체감하고 있습니다. 이 변화가 한국에 어떤 기회이자 위협인지, 제가 직접 느낀 것들을 토대로 풀어보겠습니다.
자율 에이전트: 도구에서 실행자로
파운데이션 모델(Foundation Model)이란 방대한 데이터로 사전 학습된 초대형 AI 모델을 뜻합니다. GPT나 클로드(Claude)처럼, 특정 과업에 맞게 재훈련하지 않아도 다양한 작업을 소화할 수 있는 범용 기반 모델입니다. 2011년 마크 앤드리슨이 "소프트웨어가 세상을 먹어 치우고 있다"고 선언했을 때만 해도, 이 모델들은 존재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당시의 AI는 규칙 기반 시스템에 가까웠고, 학습 데이터를 보정하는 수준이었습니다.
제가 직접 느끼기엔, 분기점이 온 건 2023년 이후부터였습니다. 그 전까지만 해도 사용자들은 "이 공식이 맞나요?"처럼 단순 확인 질문을 주로 던졌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이 계약서 검토하고 리스크 정리해줘", "경쟁사 세 곳 분석해서 전략 초안 잡아줘" 같은 요청이 일상이 됐습니다. 이것이 바로 자율 에이전트(Autonomous Agent)로의 전환입니다. 자율 에이전트란 인간이 목표만 제시하면 세부 실행 계획을 스스로 세우고, 하위 작업까지 자동으로 처리하는 AI 시스템을 말합니다.
앤스로픽이 출시한 클로드 코드(Claude Code)와 클로드 코워크(Claude Cowork)는 이 변화를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개발자가 코드 전체를 직접 짜던 시대에서, AI가 목적을 이해하고 코드를 생성·수정·배포하는 시대로 넘어온 것입니다. SAP 같은 거대한 일체형 소프트웨어를 수개월 배우던 사람들이 이제는 자연어 한 줄로 같은 결과를 얻으려 합니다. 솔직히 이 속도는 저도 예상 밖이었습니다.
도메인 지식: 한국이 쥔 유일한 비대칭 전력
오픈AI와 앤스로픽의 파운데이션 모델이 아무리 강력해도, 접근할 수 없는 데이터가 있습니다. 바로 다크 데이터(Dark Data)입니다. 다크 데이터란 기업이나 기관이 보유하고 있지만 인터넷에 공개되지 않아 AI 학습에 활용되지 못하는 현장 데이터를 뜻합니다. 한국의 반도체 공정에서 수십 년 쌓인 불량률 패턴, 조선소 설계 현장의 용접 변수 노하우, 원자력 발전소 운영의 미세한 이상 신호 판단 기준 같은 것들이 여기에 해당합니다.
제가 판단하기엔, 이것이 한국이 글로벌 AI 패권 경쟁에서 유일하게 내세울 수 있는 카드입니다. 미국은 금융·법률·리테일·광고처럼 이미 디지털화된 서비스 산업을 기반으로 자율 에이전트의 주도권을 빠르게 가져가고 있습니다. 앤스로픽이 인튜이트(Intuit)와 손잡고 세무·재무 AI 에이전트 시장에 진입한 것이 대표적입니다. 오픈AI는 인스타카트 CEO를 영입해 커머스와 광고 시장을 정조준하고 있습니다.
반면 반도체·조선·중공업·원전처럼 현장 데이터가 공개되지 않은 영역에서는 미국 빅테크도 손을 못 뻗습니다. 미중 패권 경쟁이 격화되면서 한국은 이 분야에서 거의 유일한 대안 공급국으로 떠오르고 있습니다. 이 현장 특화 지식, 즉 도메인 지식(Domain Knowledge)을 AI와 결합하는 산업용 AI 전문 기업을 한국이 먼저 키워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팔란티어(Palantir)가 미국 정부·군과 신뢰 기반의 데이터 파트너십을 구축한 것처럼, 한국도 독자적인 생태계가 필요합니다.
실제로 한국 산업계의 AI 전환 현황을 보면, 제조업 현장의 스마트 팩토리 도입률은 꾸준히 늘고 있지만 AI 에이전트 수준의 자율화는 아직 초기 단계입니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의 디지털 전환 정책과 맞물려 속도를 낼 수 있는 구조적 기반은 있지만, 실질적인 데이터 개방과 기업 간 협력은 여전히 더딥니다.
산학연: 속도전에서 살아남는 유일한 방법
기존 교육 체계로는 이 속도를 감당할 수 없다는 점에서 저도 동의합니다. AI가 지식을 생성하는 시대에 강의실에서 정해진 커리큘럼만 반복하는 건 구석기 시대 도구로 우주 시대를 준비하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제가 체감상 느끼는 건, 지금 현장에서 AI를 가장 잘 활용하는 사람들은 학위보다 "실패 경험"이 많은 사람들이라는 점입니다.
산학연(産學硏) 협력이란 기업(産), 대학(學), 연구소(硏)가 데이터와 인재, 기술을 공유하며 공동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생태계 구조를 말합니다. 이것이 이론으로는 오래전부터 강조됐지만, 실제로 작동하는 사례는 드뭅니다. 그 이유 중 하나가 데이터 장벽입니다. 조선소의 설계 데이터를 대학 연구실에 넘기는 순간 영업 기밀이 될 수 있고, 규제 환경이 이를 더 복잡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한국이 산학연 모델로 실질적인 성과를 내려면 다음 세 가지가 선행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 현장 데이터 공유를 위한 법적 안전망 마련: 기업이 데이터를 제공해도 영업 기밀 침해 우려 없이 협력할 수 있는 제도적 기반이 필요합니다.
- 실패를 허용하는 재정적 쿠션: 스타트업과 대학 연구팀이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실전 역량을 쌓을 수 있도록 정부가 리스크를 분담해야 합니다.
- 현장-대학 간 인재 순환 구조: 기업 현장에서 1~2년 실전을 경험한 인재가 대학으로 돌아와 그 경험을 교육에 반영하는 환류 시스템이 없으면, 대학 교육은 항상 현실보다 2~3년 뒤처집니다.
이 구조가 갖춰지지 않으면 아무리 우수한 인재도 현장 AI 활용 역량을 키우기 어렵습니다. 한국과학기술기획평가원(KISTEP)의 보고서에서도 산학연 연계 강화가 국가 R&D 생산성의 핵심 변수로 반복해서 지적되고 있는 만큼, 이 문제는 이미 오래된 숙제입니다.
기득권 딜레마: 한국 내부의 가장 큰 장벽
기득권 딜레마(Incumbent's Dilemma)란 기존의 성공 방식에 묶인 기업이나 기관이 새로운 패러다임으로의 전환을 스스로 가로막는 현상을 말합니다. SAP나 세일즈포스가 레거시 소프트웨어 구조를 버리지 못해 AI 에이전트 시대에 압박받는 것이 전형적인 사례입니다. 그런데 저는 이 딜레마가 외국 기업만의 이야기가 아니라는 점이 더 걱정스럽습니다.
한국의 대기업과 공공기관은 데이터를 대외비로 분류하는 관성이 강합니다. 부처 간 데이터는 사일로(Silo) 형태로 분리되어 있고, 기업 간 데이터 협력은 경쟁 우위를 잃을 수 있다는 두려움에 막혀 있습니다. 사일로란 조직 내에서 부서나 시스템이 서로 단절된 채 데이터를 공유하지 않는 구조를 의미합니다. 이 장벽을 허물지 않으면 도메인 지식을 아무리 갖고 있어도 AI로 연결할 수가 없습니다.
또 한 가지 제가 직접 관찰한 문제가 있습니다. AI 도입에 가장 열성적인 쪽이 정작 현장 전문성이 얕은 조직인 경우가 많다는 점입니다. 반면 수십 년의 현장 노하우를 가진 숙련 기술자들은 AI를 "내 자리를 빼앗을 위협"으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 간극을 좁히지 못하면, 한국의 도메인 지식은 AI와 결합되지 못한 채 그냥 묻혀버릴 가능성이 있습니다. 신뢰 기반의 리더십이 이 간극을 연결하는 역할을 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산업 전환기마다 먼저 움직인 쪽이 구조적 우위를 가져갔습니다. TSMC가 반도체 파운드리 시장을 선점한 것처럼, 한국이 제조업 도메인 AI 시장에서 신뢰할 수 있는 파트너로 자리 잡는 것은 가능한 시나리오입니다. 하지만 그 창은 오래 열려 있지 않을 것입니다.
제 판단으로는, 한국이 이 전환에서 살아남는 길은 범용 AI 경쟁이 아닙니다. 반도체·조선·원전 같은 현장에서 수십 년 쌓인 다크 데이터를 AI와 연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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